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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6-07-19

쪽지 한 장만 남기고 기억을 통째로 지웠다

작업 도중에 세션이 스스로 기억을 통째로 지웠다. 절반쯤 차 있던 대화가 순식간에 빈 화면이 됐다. 그리고 새로 열린 세션이, 밖에 적어둔 쪽지 한 줄을 읽고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.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.

AI에게 일을 시키다 보면, 대화가 길어질수록 기억이 무거워진다. 주고받은 모든 말이 작업 기억 안에 쌓이고, 그 창에는 한계가 있다. 가득 차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. 나는 그 한계를 어떻게 다룰지가 오래 고민이었다.

잊혀지는 것과 잊기로 정하는 것

기억 창이 거의 다 차면, 시스템은 알아서 오래된 내용을 요약해 자리를 만든다. 편리해 보이지만, 그 요약은 무엇을 버릴지 기계가 정한다. 무엇이 중요한지 내가 고르지 못한 채, 조용히 뭉개진다.

나는 그게 싫었다. 그래서 그 자동 압축이 시작되는 지점보다 앞에서, 세션이 스스로 기억을 완전히 비우게 했다.

핵심은 시점이다. 기계가 알아서 뭉개기 전에, 내가 정한 자리에서 깨끗하게 지운다. 잊혀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, 잊기로 먼저 정하는 것이다.

둘은 전혀 다르다. 잊혀지는 건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른다. 잊기로 정하는 건,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내가 먼저 손을 쓴다.

왜 하필 절반쯤인가

처음에는 기억 창의 절반, 그러니까 50% 근처에서 비우게 했다. 그러다 한동안 40%까지 낮췄고, 지금은 45%로 맞춰 두었다.

숫자를 이렇게 만지작거린 데는 이유가 있다.

너무 늦게 비우면, 기계의 자동 압축이 먼저 끼어든다. 실제로 재보니 그 자동 압축은 창이 꽉 차기 한참 전, 절반을 조금 넘긴 지점에서 이미 시작됐다. 표시된 한계는 넉넉해 보여도, 실제로 쓸 수 있는 여유는 그보다 훨씬 좁았다.

그래서 그 지점보다 앞에 여백을 두고 멈춰야 했다. 45%는 자동 압축이 끼어들기 전에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, 안전한 앞자리였다. 너무 이르면 자주 끊기고, 너무 늦으면 기계에 주도권을 뺏긴다. 그 사이를 찾는 일이었다.

지우기 전에 남기는 단 한 줄

기억을 통째로 지우면 하던 일을 잃어버릴 것 같다. 그게 상식이다.

그렇지 않게 만든 장치가 하나 있다. 지우기 직전에, 세션은 “지금 하던 일” 딱 하나를 밖의 파일에 적어둔다. 대화 내용을 통째로 옮기는 게 아니다. 이어서 할 일을 가리키는 짧은 표식 하나만 남긴다.

여기에는 원칙이 하나 있다. 작업의 진짜 상태는 대화 안이 아니라, 밖의 정해진 목록에 있다. 대화는 그 목록을 다루는 임시 작업대일 뿐이다. 그래서 작업대를 치워도, 목록은 그대로 남는다.

옮기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포인터다. “무엇을 다 했는지”를 대화에서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, “다음에 무엇을 볼지”를 한 줄로 가리킨다. 새 세션은 그 한 줄을 따라가 밖의 목록을 다시 읽는다. 기억을 나르는 게 아니라, 기억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.

손을 대지 않아도 이어진다

지우고 나면 보통은 사람이 다시 상황을 설명해줘야 한다. “아까 어디까지 했지”를 다시 입력해야 한다.

그 수고를 없애고 싶었다. 그래서 새로 열린 세션이, 남겨둔 쪽지를 스스로 읽고 그 일을 이어받게 했다. 사람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는다. 첫 마디조차 기계가 스스로 만들어낸다.

이걸 나는 손을 대지 않는 이어달리기라고 부른다. 사람의 개입이 0인 상태. 클리어가 일어나고, 새 세션이 뜨고, 하던 일이 다시 굴러가기까지 내가 할 일이 없다.

물론 아무 일에나 이걸 허용하지는 않았다. 밖으로 나가는 일, 되돌릴 수 없는 일, 사람의 승인이 필요한 일은 이 자동 이어달리기에서 뺐다.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건, 손을 대지 않아도 안전한 일에 한해서다.

한 번 지우면 한 번만 잇는다

이 구조에는 위험한 함정이 하나 있었다. 예전에 실제로 밟은 적이 있는 함정이다.

지우는 일과 잇는 일을 둘 다 자동으로 만들면, 둘이 서로를 부른다. 지우면 잇고, 이으면 또 차서 지우고, 다시 잇고. 끝없이 도는 고리가 된다. 한 번은 이 고리에 빠져 시스템이 제자리에서 헛돌았다.

그때 얻은 교훈이 지금 구조의 뼈대가 됐다. 지우는 행위는 자동으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. 정해진 지점에 닿으면 지우되, 그 지우기 하나가 이어달리기 하나만 낳도록 못을 박았다. 한 번 지우면, 정확히 한 번만 잇는다. 남긴 쪽지도 한 번 쓰이면 곧바로 사라진다. 그래서 같은 표식이 두 번 굴러가지 않는다.

이 안전장치에는 “지우지 말 것”이라는 표시를 붙여뒀다. 편리해 보인다고 다음에 누가 이 못을 뽑으면, 그 고리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.

배운 것

작업 기억은 넉넉한 창고가 아니라, 작고 단단한 예산이다.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가 무엇을 버릴지 기계에 맡기는 것보다, 여유가 있을 때 내가 정한 지점에서 깨끗이 비우는 편이 낫다. 잊혀지는 것과 잊기로 정하는 것은 다르다.

지우고도 잃지 않으려면, 상태를 머릿속이 아니라 밖에 둬야 한다. 이어서 할 일을 밖의 목록에 적어두면, 이어달리기는 기억을 나르는 일이 아니라 쪽지 한 장을 다시 읽는 일이 된다.

그리고 자동으로 도는 두 동작이 서로를 부르지 않게 못을 박아야 한다. 지우기 하나가 잇기 하나만 낳도록. 그래야 편리함이 무한 루프로 번지지 않는다.

기억을 비운다는 건 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. 어디에 적어두면 잃지 않는지를 아는 일이었다.


머릿속에 쌓지 않고 밖에 내려놓으면, 지워도 잃지 않는다.

— 강대종 / @ssamssae